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영성)/통일 과정 (문단 편집) === 1차 침공 === 기원전 236년[* 진왕(秦王) 정(政) 11년, [[조도양왕]](趙悼襄王) 9년] 진나라는 조나라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전에 이사의 계략을 써, [[간첩]]으로 하여금 조나라와 연나라의 관계를 이간질하여 양국이 상대방을 향해 전쟁을 일으키도록 했다. 이 계책이 먹혀들어 조나라는 연나라와 전쟁을 개시했고 진나라가 침공할 당시 조나라의 주력군은 연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황당하게도 조나라의 수뇌부는 연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거북의 등껍질로 친 점에서 매우 길하다는 점괘가 나오자 바로 앞에서 언제든 자신들을 집어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진나라를 놔두고 연나라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연나라의 수뇌부도 거북점으로 조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한 전적이 있다.] 조나라가 연나라와 전쟁을 일으키자 연나라를 돕는다는 구실로 진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남과 북 양로의 길을 빌려 조나라로 진격했다. 번오기와 양단화의 남로군은 [[안양시(중국)|안양]]과 [[업]]으로 진격하고, [[왕전]]의 북로군은 [[요양]]과 언여로 진격하여 점령했다. 진나라의 군대는 주력군이 빠진 조군을 격파하며 9개의 성읍을 점령하고, 조나라의 영내를 파죽지세로 장악해 가며 남로군과 북로군으로 하여금 남북에서 한단을 협공해 일거에 조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진나라의 침공으로 국내 형세가 매우 위급해진 조나라는 설상가상으로 조 도양왕이 병사하고 그의 아들 조 [[조유목왕|유목왕 천]](遷)이 뒤를 이었다. 유목왕은 연나라 정벌에 나가있던 조나라의 주력군에 귀환을 명령하고, 한단 북쪽 [[태항산]]의 험함과 한단 남쪽 장수(漳水)와 그 연안을 따라 축조된 장성에 의지하여 굳게 지킴으로써 진군과 대치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진나라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는 [[여불위]]에 관한 문제로, [[노애]]의 반란사건과 연루되어 [[승상]]직을 박탈당하고 [[하남]]의 봉지에 들어가 지내던 여불위에게 관동의 여러 [[제후]]들이 사람을 빈번히 보내 왕래를 한다는 것을 진왕 조정이 알게 되었고, 이는 여불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게하는 원인이 되어 결국 여불위 일가를 귀양보내듯 [[사천]]으로의 [[이주]] 명령을 내렸다. 다음해 여불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른 한 가지는 조나라를 수월하게 공략하기 위해 조나라를 공격하기 전 진나라와 위나라가 우호 조약을 체결했는데, 위나라는 진나라의 힘을 빌려 초나라의 영토를 빼앗으려고 기도했다. 또한 진나라에서도 위나라와 협력하여 초나라를 공격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져 결국 진나라는 공격목표를 조나라에서 초나라로 전환했고, 이러한 일들로 인해 제1차 조나라 정벌이 흐지부지 끝나고 두 나라는 1년간의 휴전기간을 갖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